People 상상마당이 주목하는 인물 인터뷰, 상상마당을 거친 사람들에 대한 포트레이트 그리고 아티스트 이야기를 담는 스티커

내가 자랑한 한글

KT&G 상상마당 기획전시 < 언 레이어 >

한국어로 살아가고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자랑이 됐다.

디자인 | 2014/10/13 | 글. 정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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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면 광화문 광장 주위에서 태극기가 더욱 오래 펄럭인다. 국군의날과 개천절, 한글날까지 대한민국에 대대적으로 기념할 날이 계속되어서다. 한글날에는 유독 축하가 많다. 매체와 각종 단체에서는 제각각 어울리는 방식으로 ‘한글 사랑’을 표현한다. 뉴스에서 올바른 순우리말 사용을 권장할 때 상상마당은 한글 디자인에 주목했다. 9월 26일부터 10월 12일까지 상상마당 1층 디자인스퀘어에서 한글날 기념 전시 < 언 레이어 >가 열렸다.

 

디자인스퀘어 한 쪽에는 세월이 겹겹이 쌓인 오래된 사물 몇 개가 나와 있었다. 타자기, 템플레이트 세트, 커터 칼, 색이 누렇게 바랜 종이. 모두 산돌 커뮤니케이션(http://sandoll.co.kr/IR/index.asp) 대표이자 서체 디자이너 석금호의 것이다. 수학으로 치면 문제 풀이 연습장인 서체 원도에는 그가 획마다 심어 놓은 긴요한 단서가 적혀 있었다. ‘힘과 기백이 들어간 선을 찾아라!’와 같이 글자에 숨결을 불어 넣는 말들.

  


△산돌 커뮤니케이션 대표 석금호의 소장 물건 (사진 출처: KT&G 상상마당 디자인스퀘어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smadangdesign)

 

만화 < 광수생각 >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산돌’은 ‘산돌광수체’라는 말과 함께 연상될 것이다. 만화가 박광수가 직접 쓴 글씨를 지면과 웹에서 그대로 구현되도록 만든 것이 ‘산돌광수체’다. 산돌은 약 30년 동안 한국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곳에서 서체를 꾸며왔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파워포인트와 워드를 켰을 때 기본적으로 설정되는 서체인 ‘맑은 고딕’ 또한 산돌이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개발한 것이다. 상상마당 홈페이지와 기업 KT&G에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는 서체 역시 산돌에서 만든 ‘상상체’다. 이렇게 산돌은 기업과 기관 고유의 서체를 만들며 알게 모르게 활약해왔다.

 


△ KT&G 전용 ‘상상본문체’

 

‘산돌’ 옆에는 ‘우아한형제들’의 서체(http://www.woowahan.com/?page_id=3985)가 전시되었다. ‘한나체’와 ‘주아체’라는 서체 이름이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서체의 생김이 낯익을 것이다. 우아한형제들은 바로 ‘배달의민족’의 모체 회사다. “오늘 먹을 치킨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쓰인 포스터에서 배달의 민족 광고로 접하던 브랜드 특유의 경쾌함이 비친다. ‘한나’와 ‘주아’는 우아한형제들 대표인 김봉진의 두 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산돌의 원도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나체를 만들기 위하여 디자이너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자취를 살필 수 있었다. 벽면에는 디자이너가 한나체를 만들며 그려 본 빅터 파파넥의 책 < 인간을 위한 디자인 > 서문이 소개돼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글이 한나체의 요모조모를 살피기 위한 전시 장치로 쓰이고 있지만, 폰트를 창작할 때 굳이 < 인간을 위한 디자인 > 서문 내용을 말한다는 건 선언 혹은 의식처럼 보인다. 한나체 다음에 만들어진 주아체는 우아한형제들과 산돌의 협업 작이다. 산돌은 우아한형제들이 ‘그린’ 서체가 글자와 문장으로 잘 ‘적히도록’ 기술적인 부분을 도왔다.

 


△ 한나체로 만든 ‘배달의 민족’ 로고
 


△ 한나체로 만든 포스터
 


△ 한나체(좌), 주아체(우)

 

앞서 세월이 겹겹 쌓인 사물이 있었다면, 맞은편에서는 3D 프린터가 조용히 글자의 겹겹을 새기고 있었다. 전시 기간 동안 오픈크리에이터(OPENCREATORS® http://opencreators.com)의 3D 프린터 ‘아몬드(ALMOND)’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포토샵으로 사진을 다룰 때 매 순간 거듭 포개지는 층을 가리켜 ‘레이어(layer)’라고 부른다. . ‘레이어’는 디자이너에게 익숙한 용어다. 디자이너는 “레이어가 씌워져 있네”, “레이어를 없애야겠네”라는 말을 자연스레 쓴다. 붙이기 나름이지만, < 언 레이어 >의 ‘언’은 ‘Un’이기도 하고 ‘An’이기도 하다. 레이어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서 보이는 본그림, 레이어를 하나씩 추가해 가면서 창조되는 형상. < 언 레이어 >전에서는 ‘un’과 ‘an’이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변해 왔는지 골고루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유석의 ‘Blind sound’(http://cargocollective.com/kimyousuk/Blind-Sound)는 산돌과 우아한형제들 사이에 있는 스피커다. 거기에서 한국말이 분명 나오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문장은 흐르고 있었다. 물결 표시(~)가 가해진 문장을 따라가는 기분이랄까. 엠포레스트(www.mforest.tv)에서 만든 영상 ‘한글 없는 세상’엔 실제로 한글이 빠져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문장이 없고, 알아볼 수 없는 다른 나라의 말이 적혀 있다. 한식 메뉴판에도, 종묘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에도, 한글이 아무렇지 않게 없었다. 로우로우(RAWROW http://www.rawrowshop.com)와 산돌이 함께 만든 가방엔 한글이 꼭꼭 숨어 있다. ‘문자는 모든 디자인의 기초’라는 점에 착안하여 만든 가방이다. 한글을 디자인으로 사용했지만, 가방에서 한글이 본능적으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 ‘Blind Sound’

  

△ ‘한글 없는 세상’ 전시 모습

△ ‘로우 토트백’ 전시 모습

 

10월 9일 한글날 당일을 기념해서는 ‘쨘’이라는 잔치가 열려 < 언 레이어 >전은 보다 풍성해졌다. 디자이너 석금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은 즉석에서 문구를 건네 글씨 선물을 받았고, 잔치에 어울린 친구끼리는 ‘산돌티움(http://www.tiummall.com)’의 판박이 스티커를 붙여 주기도 했다. 3D 프린터로 틀을 인쇄해 한글이 입체적으로 적힌 쿠키도 등장해 잔치의 기쁨을 보탰다. 사실 한글날에 여러 기관에서 기념 행사를 열지만, 행사를 통해 여태 한글을 아끼고 사랑했던 진실한 마음이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자는 취지가 좋긴 하나 당부의 말씀으로 들려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일진 않는다. 와중에 < 언 레이어 >전에서 준비한 ‘쨘’은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있었다. 한글을 사랑해 주길 바라기보다 모두 한글을 자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쨘’이라는 말에 담긴 것은 아닐까.

 


△ 쨘 행사 포스터와 안내문 

 

△ ’산돌티움’의 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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